본 전시회는 아르데코의 독특한 화풍과 스 타일리쉬한 매력으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뮤즈로 알려진 타마라 렘피카의 작품들을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다.
타마라는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1920년대 사교계와 당대 예술계에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소설가, 연예인, 과학자, 기업가, 귀 족등각계각층의유명인사들이그녀에게초 상화를 의뢰했고 그 화려하고 강렬한 초상화 에는 시대의 정신이 녹아있었다.
폴란드 태생의 여류화가인 타마라는 신여성 의 대명사이자 시대의 아이콘으로 회자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근대화가 본격화되던 시기 의 변화된 여성상을 화폭에 효과적으로 재현했 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며 보 수적인 미술계에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던 그녀 는 성(性)의 주제를 과감하게 표현하였으며 무 엇보다도 ‘신여성’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었 다.
이번 전시에서는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그녀 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르 데코 양식이 반영된 공간재현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 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변호사인 타데우즈 렘피키와 결혼한 후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 로 망명했던 당시 렘피카의 나이는 20세였고 어린 딸의 엄마였다. 남편이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지자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 로 결정한 그녀는 랑송 아카데미의 모리스 드니의 코스를 등록하 고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앙드레 로테에게 그림을 배웠다. 두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밤낮으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간 그녀는 당시 대규모 전시인 살롱 도톤느와 살롱 데 튈르리에 참가했다. 1925년에 이르자 타마라는 간소화된 양감으로 여성의 신체를 구와 원기둥으로 구성하였다.
1927년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가 보르도 국제 미술전에서 1등 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그녀는 성공의 대로를 걷게 된다. 타마라에 의 해 해석된 초상화는 관능적이고 우아했으며 활력이 넘쳤고 수많은 콜렉터들이 그녀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특히 이 시기의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는 젊음의 혈기와 현대적인 흐름이 나타났으며 작품 제 작과 전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아르데코의 영향 아래 탄생한 그 녀의 양식은 독창적이었으며 매너리즘이 종합된 네오 큐비즘이었다. 부드러운 입체주의로 불리는 이 스타일은 그 시대를 상징했다. 예술 과 패션 저널들은 타마라의 명성을 전했고, 뉴욕으로 초청받은 그녀 는 높게 뻗은 마천루를 초상화의 배경으로 가득 채웠다.
작품제작이 침체되면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렘피카 는 소작농과 비천한 출신의 사람들을 묘사하거나 종 교적인 주제의 작업에 몰두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전 시회들이 취소되자 코네티컷으로 돌아온 그녀는 정물 화 연작을 시작했다. 렘피카는 사실적인 묘사로 정물 화를 그리거나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업들을 모사하기 시작했고 1949년 1월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6개 월을 보냈다. 이후, 예술적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는 뉴욕, 파리, 플로렌스, 카프리, 취리히, 모나코, 마라케시 등을 돌며 광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50년대 후반, 그녀는 다른 예술가들의 다양한 기법들 을 연구했다. 조지 브라크의 방식으로 정물을 재해석 하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버나드 뷔페의 방식에도 매 력을 느꼈다. 그녀는 붓 대신 나이프로 윤곽선을 흐리 는 새로운 형태의 정물화를 시도했고 60년대 초반에 다시 구상적 접근으로 돌아가 비둘기와 수탉, 토끼, 백조 등을 그렸다. 적토를 사용한 테라코타 작업도 진 행하였는데 이 작업들은 파리의 로보마 갤러리와 뉴욕 알렉산더 로라스 갤러리에서 전시되었으나 크게 성공 적이지 못했다.
1972년 타마라의 오랜 망설임 끝에 룩셈부르크 갤러 리에서 그녀의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회의 성공규모 는 놀라울 정도였고, 미술시장은 다시 한번 타마라의 예술을 인정하였다. 이 전시회를 보고 유명작을 복제 하길 원하는 애호가들의 요구가 뒤를 따랐고 불행히 도 그녀의 손은 40-50세 초반과 같지 않았다. 타마라 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로 이사했고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아름다운 집을 샀다. 그리고 1980년 3월 18일 그녀는 딸 키제트의 품에서 운명했다.